민족의 눈물 스며든 '인천의 소금' 명맥만 남아

주안서 1907년 생산…인천서 일본 수송
소금의 인천, 수입염·재제염 제치고 명성
일본, 식민통치 재원·화학공업 원료 수탈

해방 뒤 천일염전 북한 황해 연안에 집중

주안·남동염전, 공업지구·산단으로
인천 민간염전 영종도·옹진군만 남아
소래염전, 생태공원에 포함 천일염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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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천 중구 을왕동에서 운영 중인 동양염전. /사진제공=인천시 도시경관 변천기록 아카이브
▲ 소래습지생태공원에 조성된 천일염전. /사진제공=인천시 도시경관 변천기록 아카이브

 

▲ 인천 옹진군 북도면 시도리 강원염전에서 염부가 일하는 모습. /사진제공=인천시 도시경관 변천기록 아카이브

 

“명일에 총리대신 이완용, 농상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탁지대신 고영희 사대신이 인천 주안리에 나가서 소금 굽는 마당을 시찰한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22일자에 실린 '사대신 시찰'이라는 기사다. 이들 사대신은 같은 해 7월 고종을 강제 폐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정미7적'으로 지탄받은 인물들이다. 권력을 틀어쥔 이들이 시찰한 주안에선 공사 5개월 만에 천일제염시험장이 완공됐다. 염전은 1정보, 즉 3000평(9917㎡) 규모였다. 국내 최초 천일염전이었다. 주안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서 있는, 지금의 십정동과 간석동, 주안동 경계 지점이다. 천일염전이 생기기 전부터 주안은 소금 생산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안역 북쪽은 바닷가 갯벌이었다. 천일염 도입 이전까지 소금은 바닷물을 끓여 수분을 없애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전통적 자염(煮鹽)이다.

사대신을 앞세운 일제 통감부가 주안을 주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드넓은 갯벌이 있는 황해에서 구한말 전라도는 자염 생산량의 40%를 차지했다. 시선은 위로 향했다. 개항지인 인천, 1899년 개통한 경인철도가 지나는 주안은 생산된 소금을 옮기기가 수월했다. 이때부터 식민 통치의 재원을 마련하고, 군수산업 발판인 화학공업 원료를 얻을 수 있는 천일염은 수탈의 상징이 됐다.

▲1907년 최초 천일염 '소금의 인천'

▲ 인천 부평구 십정동에 남아  있는 '한국 최초의 천일염전' 표지석.
▲ 인천 부평구 십정동에 남아 있는 '한국 최초의 천일염전' 표지석.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에는 수입산 소금이 밀려들었다. 일본과 청나라에서 들여온 소금이 시중에 풀리면서 바닷물을 가마에 끓이는 전통 제조 방식의 자염은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청나라 천일염은 또 다른 소금 제조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가격은 저렴하지만 굵고 거칠었던 수입산을 다시 녹여 입자가 고운 백색 소금으로 재가공하는 재제염(再製鹽)이다. 전통 염업을 대체한 재제염 공장은 1908년부터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금의 동구 만석비치타운아파트 자리에 '인천제염소'가 설립되면서다. 1914년이 되면 재제염 공장은 14개까지 늘었지만, 일제가 관염(官鹽)을 보호한다며 수입을 규제하면서 급속히 쇠퇴했다. 통감부에 이어 조선총독부가 생산하고 판매한 관염은 바로 천일염이었다.

1932년 조선신문 인천지국이 발행한 <인천의 긴요문제>에는 “1931년에는 1억9052만2091근, 155만3209원이라는 경성전매지국 인천출장소 개청 이래의 기록을 만들어 '소금의 인천'으로 반도에 그 명성을 떨치기에 이른다”고 언급돼 있다.

'소금의 인천'이라는 표현은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각 단체 입장을 서술한 이 책에서 수차례 등장한다. “반도에서 소비되는 4억7005만 근의 대부분은 여전히 외국 소금을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의 2억 근에서 나아가 3억 근까지 인천에서 배급하는 정도의 상권으로 확장하는 것은 인천항 번영을 도모하는 데 긴요한 일”이라는 대목도 있다. 1907년 주안에서 처음 시험 생산된 천일염은 전통 자염뿐 아니라 수입염, 재제염을 밀어내고 '소금의 인천'을 만든 것이다.

 

▲염전 조성으로 본격화한 일제 수탈

 

주안천일제염시험장이 준공된 이듬해인 1908년 78.73t(13만1218근)의 천일염이 생산됐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전매사>(1936)에서 주안염전 시험 체염을 놓고 “좋은 성적을 거둬 (천일제염이) 조선에서도 확실히 성립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1909년부터 일제 통감부는 본격적으로 천일염전 건설에 나섰다. 1945년에는 관영 천일염전 면적이 5925정보로 넓어졌다. 주안 천일제염시험장의 5925배가 된 셈이다. 천일염전은 황해 연안을 따라 만들어졌다. 주안, 그리고 대동강 하구를 접한 평안남도와 황해도 사이 광량만이 첫 대상지였다. 1910년대 주안염전은 212정보, 광량만염전은 770정보로 조성됐다.

주안에서 염전을 확장하기가 어려워지자 일제는 인천 남부 연안으로 눈을 돌린다. 당시 부천군 남동면, 시흥군 군자면을 매립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의 남동산단 위치인 남동염전은 1921년 300정보, 군자염전은 1925년 575정보 규모로 만들어졌다. 특히 군자염전은 3년 5개월간 연인원 60만명이 오이도까지 지게로 8㎞에 이르는 제방을 쌓아 조성됐다. 1937년 소래염전(549정보)에 이어 1943년에는 황해도 연백군에 1250정보 규모의 염전도 들어섰다.

천일염전 확장 정책은 식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소금은 공업 원료로 주목받았다. 인천대 인천학연구원이 펴낸 <식민지기 인천의 근대 제염업>(2017)에서 류창호 인하대 사학과 강사는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마그네슘공업이 크게 발전함에 따라 천일염전의 부산물인 고즙 유출이 확대됐고, 결국 이것은 제염 생산의 저하를 초래했다”며 “고즙공업을 통해 생산되는 마그네슘 제품들은 자동차·비행기 제작의 재료가 됨은 물론, 독가스와 같은 화학무기도 생산할 수 있었다. 전시체제 아래에선 중요 군수산업으로 보호와 지원이 아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공단에 자리 내준 주안·남동염전

▲ 1929년 인천관광지도. 빨간색 원으로 표시된 주안 염전. 당시까지만 해도 주안역 북쪽까지 바닷물이 흘 러들었음을 알 수 있다.
▲ 1929년 인천관광지도. 빨간색 원으로 표시된 주안 염전. 당시까지만 해도 주안역 북쪽까지 바닷물이 흘 러들었음을 알 수 있다.
▲ 주안염전에서 천일염을 생산하던 모습. /사진제공=인천시
▲ 주안염전에서 천일염을 생산하던 모습. /사진제공=인천시

 

해방 이후 염전은 전환의 시기를 맞는다. 일제강점기 천일염전은 북한 황해 연안에 몰려 있었다. 남한 천일염전은 주안·소래·남동·군자 등 1664정보가 전부였다. 나머지 4261정보가 북녘에 집중됐다. 남북이 분단되면서 소금 기근으로 이어진 배경이다.

정부는 소금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염증산 5개년 계획(1952~1956)'에 착수한다. 염전 개발지로는 전라남도가 떠올랐다. 신안군이 대표적이다. 피난민들이 동원돼 대규모 염전 공사가 벌어졌다. 해양수산부 자료를 보면 2019년 전국 염전 면적 가운데 신안군은 61.8%를 차지한다. 전국 32만3000t(2016년 기준)의 생산량 중 신안군 소금은 23만t(71%)에 이른다.

국내 최초로 천일염을 생산했던 주안염전은 1965년 공업지구로 지정됐다. 적자에 시달렸던 대한염업주식회사는 주안염전을 매각했고, 1960년대 후반부터 매립과 함께 공단이 조성됐다. 남동염전 역시 1985년 착공된 남동산단에 자리를 내준다.

인천에 남아 있는 염전은 이제 손에 꼽을 정도다. 현재 가동되고 있는 민간 천일염전은 중구 영종도 '동양염전', 옹진군 시도 '강원염전'뿐이다. 이들 염전의 2019년 생산량은 각각 700t, 200t이다. 영종도는 오랜 소금 생산지였다. 16세기 조선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고려 말 문인 이곡(1298~1351)의 시에는 "자연도를 지나며…소금 굽는 연기는 가까운 물가에 비꼈고"라는 구절이 있다. 자연도는 영종도의 옛 이름이다.

소래염전도 지난 1996년 문을 닫는 운명에 처했다. 일제가 소래와 남동, 군자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을 수탈하려고 부설한 수인선 협궤열차도 운행을 멈췄다. 폐염전에 1999년 개장한 소래습지생태공원은 염전 창고를 활용한 생태전시관과 4만㎡ 면적의 염전학습장을 품고 있다. 인천시 인천대공원사업소 관계자는 “소래습지생태공원에서 염부 4명이 4월부터 8월까지 연간 60t 정도의 천일염을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금의 인천' 시대는 저물었지만, 소금밭에서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연백 소금과 강화 새우가 만난다면...황해평화·남북협력 상징 '새우젓'

 

한강하구 끝자락인 인천 강화군 볼음도에서 바다 건너 북쪽으로는 6㎞ 길이의 방조제가 쌓여 있다. 북한이 1958년 여의도 7배 면적으로 간척한 연백제염소다. 지금은 황해남도 연안군 염전노동자구로 지정돼 있다.

연백에는 일제강점기부터 대규모 염전이 조성됐다. 1943년 완공된 연백 해남염전은 1250정보 규모였다. 당시 남북을 합친 천일염전 5925정보의 21.1%에 이르는 면적이었다. 연백 천일염전은 38선이 그어진 뒤에도 남쪽에 위치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연백 염전은 휴전선 위로 넘어갔다. 연백 염전의 천일염을 정제·가공하는 연백제염소 생산량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1980년대 초 연간 7만8000t의 천일염이 생산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류종성 안양대 해양바이오시스템공학과 교수는 “강화도 새우젓 판매고는 연간 600억원으로 추산된다. 연백제염소 소금과 강화도 젓새우로 새우젓을 담그면 한강하구 생태 풍부도를 알리는 동시에 남북 협력으로 나아가는 황해 평화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