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기 최초 일간지 대중일보
1945년 창간…지역 언론 씨 뿌려

인천일보 1988년 7월15일 1호부터
오늘 9000호까지 숨 가쁘게 달려

지역신문발전기금 대상사 선정
인천일보 TV·새 제작 시스템 통해
디지털 미디어 그룹 도약 날갯짓

 

▲ ·인천·경기 언론사 통폐합 ·1988년 인천신문 창간 기념 사진 ·인천일보  TV 송출  ·인천일보 TV 개국 ·인천일보 창간호 인쇄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
▲ ·인천·경기 언론사 통폐합 ·1988년 인천신문 창간 기념 사진 ·인천일보 TV 송출 ·인천일보 TV 개국 ·인천일보 창간호 인쇄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
▲ 창간 당시 인천일보 사옥
▲ 창간 당시 인천일보 사옥
▲ 영상으로 만나는 인천일보의 역사와 지령 9000호
▲ 영상으로 만나는 인천일보의 역사와 지령 9000호

▲언론의 태동

1883년 10월31일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가 발행되었다. 1885년 최초의 근대 언론인 한성주보가 주 1회 발행되었다. 1890년 1월28일 인천경성격주상보가 인천에서 발행된 최초의 근대적 신문 형태로 기록된다. 그러나 이 신문은 일본의 해외 언론사였다. 이어 인천 지역에서 발행된 조선순보(1891년), 조선신보(1892년), 신조선(1894년), 조선타임즈(1907년), 조선신문(1908년), 대한일보(1903년), 인천상보(1903년), 인천신보(1921년)도 모두 일본계 언론사였다. 즉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는 도구로 사용된 일제의 어용지들이었다.

 

▲인천·경기 언론의 역사를 연 대중일보 창간

진정한 의미의 언론은 1945년 10월7일 창간한 대중일보였다. 인천의 명망가들이 광복이 되자 지역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의기투합해 만든 인천·경기 최초의 일간지였다.

대중일보 창간 후 인천에서는 1946년 3월 인천신문(6·25전쟁 중 폐간)과 1951년 말 전시판 대한일보(2년 발행 후 폐간)가 창간했다. 1952년 8월 인천일보가 창간했으나 1961년 5월 자진 폐간했다. 1960년 인천신문이 창간했는데, 이 신문은 1968년 경기연합일보로 개제한 직후 언론 불모지였던 경기 수원시로 이전해 1970년 연합신문으로 다시 이름을 바꿔 발행했다. 조우성 인천일보 주필은 “인천의 언론사가 수원으로 이전해 경기도에 언론의 씨를 뿌렸던 것”이라고 증언했다.

 

▲박정희 유신정권 경기매일신문 강제 통폐합

대중일보로 시작된 인천의 언론은 경기매일신문이 그 뿌리를 계승했다. 대중일보에서 시작된 인천·경기의 언론사는 '대중일보→인천신보→기호일보→경기매일신문'이란 하나의 계보를 완성한다.

대중일보는 1950년 9월19일 제호를 인천신보로 바꿨고 이어 1957년 7월 제호를 다시 기호일보로 바꿨다. 1960년 7월 다시 경기매일신문으로 개정했다.

경기매일신문은 인천·경기지역 최대 언론사였다. 그런데 1973년 9월1일 통탄한 일이 벌어진다. 경기매일신문이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인천 소재 경기일보(1966년 2월 창간)와 함께 수원 소재 연합신문으로 강제 통합되고 만다. 정진철(당시 경기일보 공채 1기) 기자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인천의 많은 언론인들이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 인천분실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또한 인천의 다수 언론인들은 하루아침에 통폐합이라는 날벼락을 맞아 실직자가 됐다.

이와 달리 연합신문은 인천의 두 신문사를 통폐합한 직후인 1973년 9월1일 경기신문으로, 1982년 3월1일 경인일보로 제호를 변경했다. 연합신문은 경기신문으로 이름을 바꾸곤 9월1일 자 창간호 독자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유신시대의 새로운 장이 펼쳐질 오늘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 유신과업의 최고봉에 설 것을 다짐한다”고 전한다.

 

▲대중일보 뿌리를 지켜낸 인천일보 창간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강제 통합되고 전두환 독재정권까지 암흑기를 보낸 인천의 언론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노태우(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6·29선언으로 언론 자유화를 맞게 되었다.

이에 옛 경기매일신문사, 옛 경기일보의 소속 주주들과 양사 출신 기자들은 1988년 7월15일 인천일보(당시 제호 인천신문)를 창간한다. 강제 통폐합 때의 경기매일신문사 오종원 편집부국장이 인천일보의 초대 편집국장으로 취임한 것은 대중일보의 전통을 이어가려고 한 인천지역 언론인들의 염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선택이었다. 인천일보는 일본 스미모토사의 고속 컬러 윤전기를 도입해 매일 12면 석간으로 발행했다. 1990년 7월 창간 2주년 때 제호를 오늘날과 같은 인천일보로 바꿨다.

 

▲인천일보, 새 천년을 준비하다

인천일보는 1991년 10월18일 자 신문에서 지령 1000호 발행을 계기로 새 사옥 착공을 선언했다. 이전 해에 전산제작시스템(CTS)를 도입해 첨단방식에 의한 신문제작의 새 장을 연 데 이은 새로운 도약이었다. 이어 1993년 3월1일부터 전산제작시스템을 전면 도입했다. 1993년 6월14일 새 사옥 기공식을 가졌다. 1995년 2월3일 지령 2000호를 기념해 인천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나의 인천론'을 게재했다. 같은 해 7월15일 창간 7주년을 맞아 첨단 컬러고속윤전기를 도입했다.

1996년 12월1일부터 인천·경기지역에서 처음 뉴스비전을 도입 개통해 뉴미디어를 선도했다. 1997년 11월11일부터 가로짜기를 전면 도입했다. 1998년 5월21일 지령 3000호를 발간하는데 이어 10월 15일 인터넷 전자신문인 '리더스 인천' 서비스를 시작해 인터넷 지역 종합정보 서비스망을 구축했다. 새 천년 시대로 접어든 2000년 7월3일에는 기존 석간에서 조간으로 전환하며 20면을 발행했다. 이렇듯 창간부터 2000년에 이르기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던 기간은 인천일보가 지역언론의 선구자로서 새 천년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디지털 시대 미래로 도약을 꿈꾸다

인천일보에게 2000년대는 도전과 응전, 좌절과 도약이라는 격동의 시기였다.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 대상사'가 실시된 첫해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 연속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 대상사로 선정되며 위상을 높였으나, 대형 신문의 물량 공세와 신문산업의 위축으로 인한 경영위기와 노사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3년 간의 법정관리를 극복하고 새 경영진과 새 주주를 맞이하며 다시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2018년 1월2일 인천일보TV를 개국하며 종합미디어로 날갯짓을 했다. 2019년 11월1일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2019년 지역신문콘퍼런스'에서 영예에 대상을 거머쥐며 지역언론의 대표주자로서의 극적인 부활을 알렸다. 또한 2020년도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 대상사' 선정됨으로써 명실공히 바른 언론, 경기·인천 지역의 대표언론임을 인정받게 됐다. 그렇지만 주어진 달콤함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인천일보는 2020년을 디지털 퍼스트의 원년으로 삼고, 종이신문 위주의 뉴스제작시스템을 디지털 미디어 중심의 통합CMS로 전격적으로 전환해 새로운 뉴스제작시스템을 갖췄다. 막대한 자금이 투자된 제작시스템 교체는 경영진을 비롯한 구성원들의 디지털 미디어 시대로 향하는 의지이자 결단이었다. 이런 의지와 노력이 마침내 지령 9000호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인천일보의 전신이자 대중일보를 계승한 경기매일신문은 강제 통폐합을 앞둔 1973년 8월10일 9000호를 발행한다. 인천일보는 선배 언론인들이 눈물로 써내려간 지령 9000호의 의미를 잊지 않고 오늘 또 다시 9000호를 인천·경기 독자들과 선배 언론인에게 바친다.

/조혁신 기자 mrpen@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