驥步緻遠(기보치원), 천리마, 빨리 달리는 것보다 주인 목적지까지 섬세하게 모셔야…뜨끔한 경구로 지역 대표 언론 역할 '추궁'
지난 총선서 '지역 무시 공천'에 함구 돌려막기 행태, 중앙당에 대들고 따졌어야…감시자 역할 제대로 안 하면 시민들이 초라해져
굴업도 핵폐기장 저지·인천대교 경간 폭 확장 등 시민들과 함께했던 일이 간직해야 할 모습…통일시대 준비할 '사람 키우기' 나서야

'기(驥)·보(步)·치(緻)·원(遠)' 지용택(84·사진)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이 대뜸 건넨 글귀다. 지령 9000호를 맞은 인천일보에 꼭 일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천리를 달리는 말(馬)의 소임은 빨리 달린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네. 비단 길을 곱게 걷듯 등 위의 주인을 목적지까지 부드럽고도 섬세하게 모셨을 때 비로소 준마(駿馬)일 수 있네.” 뜨끔한 경구(警句)였다.

잘 달리는 말을 볼게 아니라 사람의 생애가 아늑한지를 살피라는 속내를 은연 중 내비친 것이었다. 삶의 장식적 요소들을 본질인 양 삶의 표면으로 띄우는 들뜬 화려함을 경계하라는 주문이었다.

“1988년 인천일보가 세상에 나올 때 '시민의 신문을 만들자'는 고민이 있었네.” 시민의 신문은 말로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지 이사장은 생각했다. 그 때 '새얼문화재단'의 이름으로 5574만원을 출자했다. 시민대표로서 인천일보 이사를 맡기도 했다. 인천일보에 대한 그의 애정의 더께는 새얼문화재단 서고에 꽂힌 20년 치 인천일보 신문 제본이 말해주고 있다.

“이 지역의 대표 언론은 뭐니 뭐니 해도 인천일보일세. 그런 인천일보가 그에 걸맞은 역할을 했는지 지령 9000호를 계기로 곱씹어봐야 하네.” 지 이사장은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지난 4·15 총선 때 인천일보가 했던 일들을 꼬집었다. “인천서 밥 한끼 안 먹은, 인천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을 공천했을 때 인천일보는 과연 뭐를 했나. 침묵했다.” 그는 인천일보의 존재를 스스로 가볍게 보는 것이 아니냐며 구성원들에게 회초리를 들었다. 정당을 떠나 “인천을 무시하는 거냐, 그렇게 맘대로 후보자를 돌려막기해도 되는 거냐”며 중앙당에 따지고 대들었어야 마땅했다는 것이다.

인천일보가 그 책임을 내려놓을 때 초라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시민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인천일보가 그곳의 사람을 쓰다듬지 않을 때 누가 지역을 위해 일하겠느냐는 되물음이었다. 엉뚱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빼앗긴 지역의 젊은이들의 상실감은 어떻겠느냐는 따짐이었다.

“그래도 시민들은 인천일보와 함께 웃고 울었던 적이 있지 않나! 명심하게나. 그것이 인천일보가 간직해야 할 모습일세.” 지 이사장은 기특했던 인천일보의 옛 일들을 끄집어냈다.

굴업도 핵폐기장이었다. 정부가 핵폐기장 건설 대상지로 굴업도를 점찍을 때부터 건설 철회를 발표할 때까지 인천은 '하나'였다. 덕적면 굴업도 현지에서, 건설을 반대하는 덕적 주민들이 농성을 하던 답동성당 야외 천막에서, 농성을 하다가 쓰러져 끝내 숨을 거둔 한 노모(老母)의 장례식 미사에서도, 인천일보는 주민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정부가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을 철회하던 그날, 덕적의 노구(老軀)들은 갯벌에 나가서 직접 딴 굴을 담은 말통 2개를 꼬깃꼬깃한 감사 편지와 함께 인천일보로 부쳤다.

인천대교 주 경간폭 확장 때도 인천일보는 시민들과 함께했다. 비록 목표했던 경간 폭 1000m 확장은 이뤄내지 못한 채 100m를 더 늘려 800m로 결정됐지만 인천의 자존심을 지켰다. 인천일보는 모금운동과 실증실험, 정부의 100m 추가 확장 결정에 이르기까지 지난했던 과정들을 이끌며 지면에 담았다. '인천은 공동체'라는 흔적을 깊게 새겼다.

“코로나19로 세상은 한 번도 걷지 못한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혼돈의 세계에서는 깨어 있는 의식만이 살아나는 법이네.” 지 이사장은 앞을 내다보며 기르고 준비하는 열정, 실행하는 능력을 키울 것을 설파했다.

그의 말은 화해와 협력, 번영으로 이끌 통일시대 준비로 귀결됐다. 남북교류의 바다 황해를 끼고 있는 한반도의 배꼽 인천이 풀어내야 하는 숙제라는 게 그의 확신이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도약의 통로가 바로 인천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쪽과 저쪽을 갈라서 분열을 일으키지 않고 충돌을 부르지 않는 품격이 깃든 '사람 키우기'가 먼저라는 게 지 이사장의 지론이다. 그 일을 인천일보가 나서서 해야 한다는 주문도 빠뜨리지 않았다. 지 이사장은 말한다. “인천일보가 잘 되는 것이 지역이 잘 되는 길이다”라고.

/글 박정환 기자 hi21@incheonilbo.com

/사진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