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발화점 개항기는 하루를 걸러 신문물이 쏟아지는 급변의 시기였다. 지금과는 다른 격동의 시대였다. 1883년 인천 제물포가 개항됐다. 산처럼 거대한 서양 함선이 바다 위에 출몰하거나, 다른 언어와 외모를 가진 낯선 민족들이 우리의 땅을 누비며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기 시작한 때였다.

제물포가 열리기 1년 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이는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자 태극기 게양의 공식적인 출발점이었다. 당시 공식 국가(國歌)가 없었던 조선은 '아리랑'을 불렀고, 미국은 국가 대신 독립 전쟁에서 외쳤던 '양키 두들'을 불렀다. 이후 조선은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서구 열강과 조약을 이어나갔다.

서구 문물이 밀물처럼 쉴틈 없이 들어오는 동안 조선은 본격적인 근대에 접어든다. 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자주독립 국가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나라를 상징하는 공식적인 노래를 제작한다.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음악은 근대 국가에 걸맞게 서양의 음악, 즉 양악으로 불리길 원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양악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는 옆 나라 일본으로 눈을 돌려 그들의 공식 국가를 양악으로 편곡한 독일인 음악 장교 프란츠 에케르트를 초청해 국가 창작을 의뢰했다. 1902년, 마침내 공식적인 국가 <대한제국 애국가>를 세상에 공표한다.

국가를 상징하는 노래를 얻은 기쁨도 잠시였다. 일제는 조선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의 모든 것을 하나씩 제거 또는 금지했다. 그중 <대한제국 애국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금지된 국가를 부르는 대신 다양한 노래를 애국가로 대체했다. 사실 공식적인 국가의 탄생 전후로 사람들은 다양한 비공식 애국가를 만들어 불렀다. 외세의 압력, 민족의 단합, 자주독립을 호소하는 계몽적 성격을 가진 노래다. 주로 서양의 기독교 찬송가, 민요 등에서 선율을 차용해 새로운 가사를 붙여 노래했다.

인천에도 애국가가 존재했다. 1896년 5월19일 독립신문에는 인천 제물포 출신 전경택의 애국가가 소개됐다. 서양식 기보법의 오선보가 익숙하지 못한 시대적 배경을 짐작해 선율은 배제한 채 가사만 전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순히 국가를 상징하는 수단을 넘어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소망이 담긴 노래다. 외세의 압력을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인천 제물포에서 시국의 심각함을 천하에 알리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또 이 곡은 현재까지 발견된 애국가 중 가장 오래된 국내 최초의 애국가로 인정받는다.

외세의 압박 속 계몽의식을 한마디 말보다 노래로 만들어 전파하며 독립을 염원했던 과거의 애국가. 당대 애국지사들은 비공식적인 애국가 가사를 만들어 배포했고, 프란츠 에케르트의 대한제국 애국가에 이어 안익태의 애국가까지 공식적인 국가의 탄생도 볼 수 있다. 사실 애국가와 국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애국가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비공식적인 노래, 국가는 나라를 상징하는 공식적인 노래로서 의미를 지닌다. 우리나라는 국가의 제목이 <애국가>이기 때문에 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애국가와 국가는 의미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뜻은 하나다. 노래로 자주독립을 외치며 국가를 상징하는 노래까지 탄생시킨 근대 역사다. 외세의 압박에서 자주독립을 원했던 선조의 간절한 염원이 노래에서까지 느껴진다. 현재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가의 이름은 <애국가>다. 급진적 성장을 이룬 현재 모습 뒤에는 당시 후손에게 밝은 미래를 물려주고 싶었던 선조의 마음이 노래에까지 투영돼 있다.

 

이승묵 인천콘서트챔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