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가 '국가'라는 개념과 맞물려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첫 사례는 1960년대 서독(지금의 독일) 파견이었다. 간호사들은 가난한 한국의 부흥을 위해 '3년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고 급여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괴상한 계약서에 서명하고 이국땅으로 향했다.

간호사들이 보낸 돈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기반이 됐으며, 이들의 활약은 서독이 지속적으로 한국을 지원하는 계기가 됐다.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서독 언론은 “어쩌면 저렇게 일할 수 있을까”라며 '코리아니쉐 엥겔'(한국의 천사)로 불렀다고 한다. 간호사들은 받은 봉급의 대부분을 고국의 가족에게 송금했는데, 그 규모가 우리나라 총 수출액의 2%에 달했다.

지난 12일 '국제 간호사의 날'을 맞아 호주의 멜버른 거리에 전시된 벽화에는, 지구 밑에 날개 달린 의료인이 있다. 호주의 화가 2명이 그린 '최전선의 영웅들'이라는 제목의 이 벽화는 의사_간호사가 코로나에 맞서 세상을 떠받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세균 총리는 페이스북에서 “지금도 간호사분들은 의료 현장에서 쪽잠과 반창고 투혼을 이어가고 있다”며 간호사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신천지교회 집단감염이 발생한 대구_경북에 의료봉사를 자원한 간호사는 3900여명에 달한다.

의료 관계자는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간호사가 자원해 헌신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고 밝혔다. 희생도 컸다. 환자를 돌보거나 검체 채취 중 바이러스에 감염된 간호사는 모두 10명이다. 근무환경이 열악해 방호복을 입고 2시간을 일하면 2시간을 쉬어야 시스템이 지켜지지 않았고, 간호사 2명이 환자 20명을 돌보는 병동도 있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코로나 격리병동에 망설임 없이 들어가 누구보다 가까이서 환자 곁을 지킨 이들이 간호사다.

김성덕(42) 간호사는 “굳이 가야 하느냐”며 대구행을 말리는 남편과 딸에게 “지금 아니면 언제 가느냐”며 설득했다. 그는 대구로 출발하기 전날 고향인 전북 장수군의 빈집에 전기매트, 부탄가스 등 생필품을 사다 놓았다. 김씨는 확진 판정 후 병원에서 완치됐지만 다시 빈집으로 가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전기만 들어오는 곳에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다. 대구로 떠나기 전에 이미 감염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비록 바이러스가 성문은 넘었지만 민가까지 덮치지 못하게 한 최일선 저지선은 간호사였다.

앞으로 더는 이들이 국가 위기의 난간에 서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코로나 사태 와중에서 '간호사 영웅'이라고 말이 자주 등장했다. 하지만 영웅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 무겁다.

 

김학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