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림

땅은 달아오르고 시간은 더디가고 새들은 징벌처럼 서 있다. 참나무와 도토리나무들도 서 있다. 새들은 이파리 사이사이 빠져 나가는 여름을 보며 울고 있지만 그들이 왜 우는지 아무도 보려하지 않는다. 참나무와 도토리나무들도 보려 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그들의 존재를 강조하기 위하여 요란한 화장을 하고 가면을 쓴다. 오 더러운 여름이여 검은 그늘이여 형벌이여. 라디오는 볼륨을 높여 이 강산 낙화유수를 불러대고 새들은 울고 해는 구부러져 간다. 나는 변두리에서 변두리로 이동한다. 이동이 나의 속성이므로 오늘도 나는 이동을 반복하면서 여름을 견딘다. 이 강산 낙화유수와 나무와 새들도 각각의 방식으로 여름을 견딘다.

 

▶우리는 지금 여름을 견디고 있다. 여름은 `검은 그늘'이며, `형벌'이고, 곧 `존재'이다. 존재를 강조하기 위해 “요란한 화장을 하고 가면”을 쓰지만 그것은 허망한 것이다. 그것은 화장과 가면과 같이 거짓된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새, 참나무, 도토리나무' 등이 존재를 견디는 방식은 `정지'의 미학이다.

그들은 `징벌'처럼 서서 여름을 견딘다. 타인의 울음조차 보려하지 않고 서로의 자리에서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새, 참나무, 도토리나무' 등이 `정지'의 미학으로 존재를 견디고 있다면, `낙화유수, 시간, 해 그리고 나'는 `흐름'의 미학으로 존재를 견딘다. 꽃잎은 떨어지고 물은 흐르고, 시간 또한 더디 흐르고, 해는 구부러져 가며, 나는 변두리로 이동한다.

삶의 모든 것들은 그들의 나름대로 여름을 견딘다. 존재의 고통을 견디는 각각의 방식, `정지'와 `흐름'의 방식은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고 각각의 방식으로 공존한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각자의 여름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권경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