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엔 문학산(文鶴山)을 `배꼽산'으로 불렀다. 어른들이 그렇게 부르니 그러려니 했다. 이름이 정겨웠다. 배꼽이라니. 좀 우습긴 했어도, 어른들 말로는 산 봉우리가 사람의 배꼽을 드러낸 것처럼 보여 그리 불렀다고 한다. 지금 그 배꼽은 없다. 다만 1950년대 말까지는 배꼽이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다.

배꼽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문학산 정상엔 옛날 통신 수단인 봉화대(烽火臺)가 자리했다. 능선을 따라 마치 사람이 배꼽을 내놓고 누워 있는 형태여서, 배꼽산으로 통했다. 그럴 듯하다. 그만큼 오랜 세월 나라를 지켜오던 봉화대의 역사와 기억을 사람들은 잊지 않았으리라.

봉화는 나라에 사변이 닥쳤을 때 신호로 올리던 불이다. 전국 높은 산 정상에 봉화대를 설치해 밤엔 횃불, 낮엔 연기로 변경 정세를 중앙에 급히 전달했다. 문학산에 봉수가 있었다는 사실은 국가 안보에 인천지역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입증한다. 봉화대와 함께 아주 오래 전부터 문학산엔 산성을 쌓아 적의 침입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1960년대만 해도 문학산, 즉 배꼽산은 학교의 단골 소풍지였다. 마땅히 갈 곳이 별로 없었던 그 시절, 문학산에서 즐기는 소풍은 참 싱그러웠다. 지금처럼 숲이 우거지지 않았어도, 오래간만에 산을 배경으로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새롭다. 요즘 맑은 날 산에 오르면, 영종·무의·용유·팔미 등의 섬을 품은 인천 앞바다가 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

인천의 주산(主山)인 문학산 주변에선 신석기 시대 지석묘·돌도끼·돌칼·돌화살촉 등의 유물이 출토돼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곳엔 이미 5000여년 전부터 우리 조상이 살았음을 짐작케 한다. 2000여년 전엔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가 배꼽산 기슭에 터를 잡고 미추홀(彌趨忽)이란 나라를 세웠다. 미추홀 이후 고구려·신라·고려·조선을 거치며 매소홀(買召忽)·소성(邵城)·경원부(慶源府)·인천(仁川)으로 개칭해 오늘에 이르렀다.

왜 뜬금없이 배꼽을 얘기하나. 배꼽은 인체의 중심이자 생명력을 잇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배꼽산인 문학산은 `우주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비류가 문학산 일대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일도 결코 우연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곳곳에 배꼽산이 흔히 자리잡고 있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천시가 시 기념물 1호인 문학산성을 체계적으로 보존하려고 첫 정비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1959년 시작된 미군기지화 작업으로 문학산 정상 봉화대와 일부 산성 등 인천을 대표할 만한 사적이 사라진 데 대한 아쉬움에서다. 한국군이 주둔한 이후에도 계속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다가, 2015년 시민들의 요구로 정상부를 개방할 때까지 시는 실질적인 문화재 조사를 벌이지 못했다. 이번 종합적인 정비·관리 방안에선 아무쪼록 배꼽산의 유래도 잘 살펴 시민들에게 `인천의 뿌리'를 돌아보게 했으면 싶다.

 

이문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