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1980년대 초반까지 군복무를 한 남자들에겐 흔한 '애창곡'이었다. 군가에 진력이 날 쯤에 부르는 '지하 군가'나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실실 웃으면서 부르는 노랫말은 그러나 너무 저속했다. 부르기에 참 민망했지만, 비속어가 판치던 군대 특성상 통용됐다. 오랫동안 군인들에게 아주 널리 불렸다. 사회에도 퍼져 몇몇 젊은이는 술잔을 부딪히며 목청껏 이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노래 말미에 나오는 가사엔 여성비하가 정말 심했다. '사회악'을 방불케 했다. 노래가 군대나 사회에서 점차 자취를 감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군대 시절 뜨악한 이 노래를 접하고, 왜 하필이면 인천일까를 떠올렸다. 인천과 성냥공장은 무슨 관계일까. 의문은 전역 후 좀 지나서 풀렸다. 인천은 바로 국내 성냥제조업의 뿌리였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1917년 인천부 금곡리(현 동구 금곡동)에 조선인촌(성냥)주식회사가 들어섰다. 직공 500여명이 연간 7만여 상자를 만든 우리나라 최대 성냥공장이었다. 당시 국내 성냥소비량의 20% 이상을 점유할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해 지방 학생들이 인천에 수학여행을 와서 들렀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회사가 잘 나가면서 금곡동 일대엔 유사한 성냥공장이 잇따라 문을 열기도 했으니, 인천은 명실공히 성냥제조업의 본거지였다. 아울러 금곡동과 송림동 지역 500여 가구가 성냥갑을 만들어 공장에 납품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성냥갑 제조는 인천 최고 가내수공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유독 인천에서 성냥제조업이 번창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항구도시 특성상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다. 여기에 압록강 부근 오지에서 벌채한 나무들을 신의주항을 거쳐 인천항으로 반입하는 등 성냥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무렵엔 기계화를 이루지 못해 성냥개비에 인을 붙이거나 성냥개비를 갑에 넣는 작업을 전부 사람 손으로 했다. 성냥공장엔 주로 10대 소녀들이 일을 했다. 유황냄새로 찌든 공장 안에서 성냥개비와 하루종일 씨름을 하며 보냈다. 그 때는 성냥이 꽤 비쌌다는 점에서, 몇몇 여직공이 성냥을 슬쩍 감춰 나오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겠다.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는 그 상상력에 더해 저속한 노래로 전락했다고 여겨진다. 그런가 하면 인천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던 성냥공장 직공들의 파업을 빼놓을 수 없다. 1926년 4월 조선인촌주식회사에서 임금인상은 물론이고 여성노동자에 대한 비인격적 모욕 등을 참지 못해 벌인 첫 투쟁이었다.
동구가 지난해 개관한 성냥마을박물관의 다양한 전시를 위해 성냥산업 관련 유물 확보에 나섰다. 인천지역 근현대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역사?문화 자료를 구입하기로 했다. 아무쪼록 지금은 1회용 가스라이터 범람으로 거의 사라진 성냥의 역사와 제작 과정, 생활 변화상 등이 새로 조망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