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탄압에 끈질긴 투쟁으로 답하다

 

▲ 김수민 의진의 주 활동지 고랑포로 흘러드는 임진강. 멀리 개성 송악산 지락이 보인다.

 

▲ 13도창의대진의 서울진공작전 모형도.(독립기념관)

 

▲ 김수민 의진 활약지 옛 장단 지역 이정표.

 

▲ 김수민 의진의 척후장 김오룡 의병장 피체.(<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0권. 122쪽)

 

▲ 강화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김수민 의진의 활동지 개성 송악산. 현재 북한지역이다.

 

분파소·철도가교 파괴하며 맹활약

일본군에 근거지 습격당해 큰 피해

이인영과 합진 서울진공작전 수행

13차례 전투 등 분전했지만 역부족

전열 재정비해 임진강 인근서 맹위

재피습 이후 강화도 이동 활동 재개



◆13도창의대진 총대장 이인영 직할대와 합진하다

김수민 의진은 경기 장단·마전 등지를 중심으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7년 10월27일 700명의 의진을 이끌고 장단군 고랑포(高浪浦) 헌병분파소를 불태우고 마전군 강동면으로 이동하였다.

일본군과 교전하면서도 의병모집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11월에 들어서는 의진의 규모가 900여 명으로 늘어나자 장단·마전을 넘어 풍덕·개성 등지로 활동영역을 확대하였으며, 당시 추진되고 있던 13도창의대진의 일익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1월10일 김수민 의진은 풍덕군으로 진출하여 영비포분파소를 공격하여 불태웠고, 이어 개성군으로 이동하여 예성강의 창릉포를 공격하였고, 그 일대에 방곡령을 선포하였다.

또한 석포(席浦) 철도 가교를 불태우고 개성을 사방에서 포위 공격할 것이라고 공언하여 그 위세를 떨쳤다.

김수민 의진이 헌병분파소, 철도 가교 등을 파괴하자 일본군은 개성수비대를 장단군에 급파하였다.

김수민 의진이 문안동에 숙영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각 공격에 나섰으나 이를 눈치 챈 김수민은 의진을 연지동 동방 고지로 이동시키고 그곳에서 대포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김수민 의진에 크게 패한 일본군은 11월17일 다가미(田上) 대위가 이끄는 개성수비대를 김수민의 고향이자 의진의 주 근거지인 장단군 북면 솔랑리로 급파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하자 김수민 의진은 6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구식 대포 8문을 빼앗기는 큰 피해를 입었다.


"김수민이 거느리는 의병 약 300명이 장단군 솔랑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60명이 전사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집, 융희 원년 11월 17일)


그 후 13도창의대진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의 직할대와 합진하여 의병투쟁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 사실이 김수민의 판결문에 나타나 있다.


"동년(1907년-필자 주) 음력 12월 중에 이르러서 피고는 부하 병정 약 100명을 이끌고서 피고와 동일한 목적으로 행동하는 이인영 부대와 합병한 후 이인영·이은찬(李殷瓚) 등과 같이 경기도내 장단·마전 등의 각 군을 횡행하며 수회 일본병과 교전하고…."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권. 77쪽)


이인영은 13도창의대진이 서울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먼저 강원·경북·충북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벌여 일본군을 서울로부터 밖으로 유인한 후 마지막에 양주로 집결하라고 하였다.

당시 황성신문(1908년 1월25일)에는 의병 300여 명이 열은동(悅隱洞) 부근에서 개성수비대와 교전했다는 내용과 일본군이 동대문 밖에 속사포(기관총)를 설치했다는 기사가 나오고, 1월30일에는 의병이 입성한다는 풍설로 일본군 수십 명이 4대문을 지키고 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른바 <조선폭도토벌지>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1월 19일 북부 수비관구 사령관 오카자키(岡崎) 중장은 막료 2명을 거느리고 재 경성 보병 제51연대 7중대를 이끌고 포천 부근 폭도(暴徒:의병-필자 주)의 소탕을 실시하였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21일 경성으로 귀환하였다.
1월 중순 구화장(九化場) 부근에 폭도가 도량(跳梁), 그것을 토벌하기 위하여 개성수비대 다가미(田上) 대위는 부하 26명과 한국 장교 이하 15명을 인솔하고 20일 개성을 출발, 거문리를 경유 전진하여 21일 열은동(悅隱洞) 부근에 폭도 집합의 보고를 받았다. 그 후 계속 전진하여 열은동 및 그 서북방 고지에 진을 치고 구식 포 약간을 가지고 있는 약 3백 명의 폭도와 충돌, 그 수괴 전 시위대 보병 제1연대 제1대대 소속 향관(餉官)이었던 현덕호(玄德鎬) 이하 28명을 사살하여 궤주(潰走)시키고, 다시 패잔 폭도를 추격하여 22일 송탄(松灘) 부근에서 약 50의 폭도를 궤란(潰爛)시키고, 23일 구석리(九石里) 부근 패잔 폭도 퇴각중인 자를 추격하여 그 5명을 사살하고 남방으로 산란(散爛)시키고 24일 수비지로 귀환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727~728쪽)


여기에서 "구화장 부근에 폭도…, 열은동 및 그 서북방 고지에 진을 치고 구식 포 약간을 가지고 있는 약 3백 명의 폭도"는 이인영 직할대와 합진하여 총도독으로 활동했던 김수민 의진으로 보이고, 서울진공작전에서 전 시위대 부위 현덕호(玄德鎬)를 비롯한 28명의 의병이 순국한 것이 드러나고 있다.

현덕호는 정3품관으로 군대해산에 반발하여 신태식(申泰植) 의진에 참여했고, 뒤에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여하여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했다가 순국한 것이었다.


◆서울진공작전, 대단했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

1908년 1월28일(음력 12월25일) 이인영 총대장이 군사장 허위로 하여금 13도창의대진 48개 의진에 통문을 내어 서울진공을 중지할 것을 지시한 후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문경으로 향하자 서울진공작전은 마침내 무산되기에 이르렀다.

서울진공작전은 한겨울 변변찮은 무기로써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로 13차례나 전투를 치를 만큼 대단했지만 결국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총대장의 명령에 따라 김수민 의진은 장단군 구화장 방면으로 회군하여 의진의 근거지로 삼아 양주, 포천 등지의 의병들과 연합하였다.

경기 동북부 지역 의병들과 연합의병을 형성하여 개성, 연천, 마전 등지로 이동하면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여러 의병장과 함께 7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장단 고랑포 등지를 공격하였다.

이어 2월13일에는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개성 북방 대흥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또 14일에는 연천군 읍내를 공격하여 우편취급소와 헌병분파소를 파괴하였다.

이에 일본 군경은 밀정과 척후활동을 강화하여 의병의 동향을 파악하여 기습공격을 가했다.

2월20일 김수민 의진 200명은 개성 북방에서 일본군 금천수비대 척후대의 기습공격을 받아 19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또 23일에는 의병 100여 명이 장단군 동도면 사세리를 공격하였지만 이를 탐지한 일본군경 연합부대의 기습을 받아 몇 시간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지만 19명의 사상자를 내고 장단군 구화장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처럼 일본군은 밀정과 척후활동 등을 통해 의병부대의 동향을 파악하고 기습공격을 가함으로써 의병활동을 위축시키고자 하였다.


"1. 2월 27일 영평·연천과의 연락을 위하여 소림 상등병 이하 3명을 사랑리(이 지점은 동두천의 북방으로 동두천헌병정지척후와 연천과 영평수비대와 매일 연락을 하기 위하여 각 방면으로부터 척후를 파견하는 곳이다) 부근에 파견하였던 바, 척후는 오전 10시, 하원리 서방 고지에서 약 60명의 폭도와 만나 교전한 지 약 2시간 후 이를 북방으로 흩어지게 했다. 생각하건대, 이 적은 그날 마전·연천 사이를 거쳐서 감파 방향으로부터 양주 방향에 이르고자 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추격에서 후속 부대가 있었던 것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그들에게 다수의 부상을 준 것을 알지만 전사자를 인정할 수 없다. 우리 소모탄은 173발로 손해 없다.

2. 그날 다카하시(高橋) 오장 이하 10명으로 하여금 무건리·진천리·목현리·상외리 방향을 수색하였으나, 조금도 얻은 바 없다.

3. 그날 개성수비대로부터 파견된 토벌대의 통보에 의하면, 장단군내에는 지금 수백의 폭도가 횡행하고 그 수괴는 김수민이라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0권. 110쪽)


그러나 이러한 일본군의 탄압에도 김수민 의진은 임진강 유역에서 주도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3월24일 김수민은 150명의 의진을 구성하여 고랑포에서 마전군으로 진출하여 군내면 냉정리에 매복했다가 정찰 나온 일본군 수비대 마스마(增田) 상등병 외 4명을 공격하였다.

이어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피해 부대를 나눠 장단군 구화장과 고왕산 방면으로 분산하여 이동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김수민 의진의 척후장(斥候將) 김오룡(金五龍)이 체포되고 말았다.


"적괴(賊魁:의병장-필자 주) 김수민의 신용을 받아 폭도 간에 그 세력을 떨친 척후장 김오룡을 체포하였다. 동인은 일찍이 장단군 소랑리(小浪里:솔랑리率浪里 오기-필자 주)에서 300명의 당여(黨與)를 지휘하여 관군에게 항거하고, 또 마전분파소 근무 순검 한복진(韓復鎭)이 폭도 정찰로 마전시장에 밀행한 것을 탐지하고 이를 총살한 자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22쪽)


4월 들어서는 김수민 의병장은 주요 활동지를 마전군에서 다시 장단군으로 이동한 후 의진을 20~30명의 소규모 인원으로 유격대를 편성한 후 4월16일 구화장헌병분견소를 공격하여 병기와 탄약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여기서 노획한 병기와 탄약으로 의진의 전투력을 보강하여 장단·풍덕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김수민 의진을 진압하기 위해 이른바 '토벌대'를 편성하였는데, 헌병 100여 명과 삭녕수비대와 적성수비대로 구성된 대규모 부대였다.

이렇게 편성된 일본군은 5월2일부터 약 20일 동안 개성 부근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의병 학살전에 나섰으며, 점차 지역을 확대하여 삭령, 마전, 토산, 철원, 영평 등 황해도 일부를 포함한 임진강 유역과 경기 동북부 지역까지 장기간에 걸친 그물망 같은 의병 학살전을 단행하였다.

이로 인해 김수민 의진은 큰 타격을 입어 6월에서 9월까지 소규모 의진으로 유지하다가 마침내 연기우(延基羽) 의진과 함께 강화도로 가서 이능권(李能權) 의진과 연합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