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싫어한 소설문체 쓰다 귀양…희귀 은어·야담 기록
▲ '정조대왕 어진'(수원 화성). 정조는 문체를 통하여 자신의 왕국을 통치하려하였다.
▲ '정조대왕 어진'(수원 화성). 정조는 문체를 통하여 자신의 왕국을 통치하려하였다.

 

문무자(文無子) 이옥(李鈺,1760~1815) 선생은 1799년 음력 9월13일, 괴나리봇짐 하나를 메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정조는 사망하기 한 해전, 선생에게 귀양을 명하였다. 10월18일 귀양지인 삼가(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쌍백면·가회면·대병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에 도착한다. 그리고 1800년 2월18일까지 읍성 서문 밖(금리 하금마을) 박대성(朴大成) 점사(店舍, 주막)에 방을 얻어 120여일을 기거하면서 밥을 사 먹으며 지냈다. <담정총서(潭庭叢書)>에 수록된 <봉성문여(鳳城文餘)>는 이때 삼가에 머물면서 보고 느낀 기록이다.

이 책은 총 64항목으로 역사·유적·토속·민속놀이·무속·야담·필기·방언·은어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책에는 전통문화에 대한 선생의 자존의식과 도덕관 등이 두루 드러나 있다. 한편 토속·민속놀이·무속에 관한 기록들은 당시 이 지방의 민속학 연구에 새로운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또한, 이 지방 방언과 도적들이 쓰는 은어에 관한 내용은 양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희귀한 자료다. 야담·필기류에서 관찰할 수 있는 선생의 도덕관은 특이하다. 지배층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반면, 하층민에 대해서는 관심과 흥미를 나타내고 있다. 선생의 생생한 세태 묘사 문체는 패사소품(稗史小品)으로서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선생은 자신의 글쓰기를 "근심의 전이 행위"라고 하였다.

선생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기상(其相), 호는 매사(梅史)·매암(梅庵)·경금자(絅錦子)·화석자(花石子)·청화외사(靑華外史)·매화외사(梅花外史)·도화유수관주인(桃花流水館主人)이다. 경기도 남양주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실학자 겸 작가이며 당파는 남인계열이다.

선생은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 후손이다. 선생 가문은 5대조 이경유 (李慶裕, 1562~1620)와 그의 형 이경록(李慶祿)이 무과에 급제하면서 문관에서 무관으로 전신하였다. 이경유가 본처와의 사이에 아들을 두지 못해 서자 이기축(李起築, 1589~1645)이 대를 이었으며, 기축 역시 무과에 급제하였다. 기축의 아들로 선생의 증조부가 되는 만림(萬林)도 무과에 합격하였다.

선생의 가문은 왕족 피가 흐르고 있기는 하지만 이렇듯 무반으로 전신한데다가 기축이 서자라는 사실과, 집안 당색 또한 북인 일파인 소북 계열이었기 때문에 노론 세가 막강했던 조선 후기에 소북 출신이라는 배경은 조선 사회에서 주변부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부친은 이상오(李常五)로 1754년 집안 인물 가운데는 처음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첫 번째 부인 남양 홍씨(홍이석(洪以錫)의 셋째 딸이고 첫째 딸은 역시 실학자 유득공의 어머니다.)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고 사별하였다. 부친은 재혼하여 다시 두 아들을 두었는데 선생은 이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났다.

1764년, 본가는 경기도 남양 매화동으로 바닷가에는 집안 어장이 있었고 밭으로 일구는 땅도 있었으며 집안에는 수백 권 장서가 있어 선생은 5~6세에 이미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16세인 1775년 최종(崔宗)의 딸과 혼인했다. 31세인 1790년에 생원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1792년(정조 16)에 선생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김응일(金應一)의 사랑에서 김려와 함께 공령문(과거시험 문체)을 연습했다.

36세인 1795년 소설 문체를 썼다 하여 정조의 견책을 받았다. 이른바 정조의 '비변문체(丕變文體)'에 걸려든 것이다. 정조는 순정고문을 탕평책을 펴기 위한 고육지책이라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글을 통해 정국을 끌고 가려 했다. 자신이 문을 직접 통제하여 세상 도리를 밝히는 글을 자기 치하에 두려 한 속내였다. 문풍(文風)이 세도와 관계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이를 두고 세칭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 하는데 이는 고교형(高橋亨,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리·한국 사상 연구가인 일본인 타카하시 토오루)의 연구 이래 붙여 진 명칭이다. 따라서 원래대로 '비변문체(丕變文體)', '문체지교정(文體之矯正)', '귀정(歸正)' 등으로 부르는 게 마땅하다.)

정조는 문체를 개혁한 뒤에 과거에 나아가도록 명했다.
이때 선생은 충청도 정산현에 충군(充軍)되었으나 그해 9월에 다시 서울로 와서 과거를 봤다. 반성문 글을 하루에 50수씩 지어 문체를 뜯어 고친 연후에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벌을 받은 이후에도 정조로부터 문체가 이상하다 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벌인 '정거(停擧)'를 당한 것이다. 1796년(정조 20)에 다시 시험을 보아 별시 초시(初試)에 방수(榜首, 1등)를 차지했으나, 이때에도 역시 문체가 문제되어 방말(榜末, 합격자 중 꼴찌)에 붙여진다.

정조는 이렇게 하고도 못내 언짢았던가보다. 두 해 뒤, 끝내 선생을 삼가현으로 귀양보내고야만다.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문학박사)은 인하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며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