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치욕…침략전쟁 지켜만 봐야 했다
▲ 일본 메이지 신문에 보도된 풍도해전의 승리를 그린 니시키에 그림.
▲ 독일 신문에 수록된 인천에 상륙하는 일본군 삽화

 

조선 지배권 두고 일어난 청일전쟁
일 기습공격에 풍도 앞바다서 시작
일, 평양전쟁 승리 이후 내정간섭
여순항서 시민·군인 2만여명 학살
청, 웨이하이 함락 뒤 패색 짙자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조선 독립국 인정 … 종주권 포기


청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1894년 7월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어진 동아시아의 국제전이었다.

제물포항에서 불과 50㎞ 떨어져 있는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의 기습공격에 의한 해전이 발발하면서 시작된 이 전쟁은 육로로는 평양전투를 거쳐 압록강을 넘어 청의 영토로 확대되고 해로로는 황해바다를 가로질러 산둥반도의 전략적 요충지에서 격전이 전개되었다.

스러져가는 중화제국과 새로운 근대 제국주의국가로 부상하는 일본제국 사이의 긴장 관계에 뇌관이 된 것은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이었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갈등은 조선의 내정개혁과 척양척외를 외치며 봉기한 조선 민중을 잔인하게 진압하며 한반도에서 전쟁으로 치달았다.


1894년 7월25일, 아산에 청나라 병력을 상륙시키고 본국으로 돌아가던 청나라 순양함 제원호와 광을호는 인천 덕적군도의 울도 부근에서 일본 군함의 공격을 받았다.

순양함 요시노, 나니와, 아키츠시마로 구성된 일본 제1유격함대가 아산 근해를 순찰하다 기습공격을 가한 것이다. 전투는 1시간 만에 화력에 밀린 청나라 군함이 도망치다 광을호는 화약고가 폭발하면서 암초에 좌초되었고 제원호는 겨우 탈출하였다.

연이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목적으로 병력을 실은 수송선 고승호와 호위군함 조강호가 아산을 향하다 일본함대와 맞닥뜨렸다.

청나라가 임대한 영국 국적의 2134톤급 상선 고승호에는 1200명의 군사와 보급품, 장비가 적재돼 있었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지휘한 일본함대는 조강호를 일본으로 압송하고 고승호도 나포하려 하였으나, 고승호의 청나라 병사들이 저항하자 어뢰를 발사하여 울도 앞바다에 침몰시켰다.

8월1일에는 공식적으로 청나라와 일본 간에 전쟁이 선포되었다.

풍도해전으로 상징화된 청일전쟁은 즉각 전세계로 타전되었다.

전쟁은 황해바다와 한반도 내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본은 병력을 추가파병하여 인천에 상륙시켰다.

외국군대의 첫 번째 인천상륙작전이 불시에 감행되었던 것이다. 청일 양군은 아산 성환전투에 이어 평양에서 군은 여러 경로로 평양에 모여들었다. 일본군은 대규모 전투를 전개하였다.

평양전투에서 청나라 군대는 2000명의 사망자와 4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일본군은 500~600명의 사상자에 그쳤다. 마침내 일본군은 1894년 9월 16일 아침, 평양에 입성하였다. 평양전투 이후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1894년 9월17일, 청나라가 자랑하던 북양함대가 일본의 함대와 압록강 하구에서 맞서 큰 해전이 벌어졌다. 황해해전이다.

북양함대는 화력이 우위에 있었음에도 더 큰 피해를 입고 제해권을 일본에 넘겨주고 여순항으로 퇴각하였다.

하지만 요동반도에 먼저 상륙한 일본육군 2사단은 여순항을 포위, 공격하여 11월 21일, 마침내 여순항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여순에 거주했던 약 2만명의 시민과 군인들을 학살하는 '여순 대학살'을 저질렀다.

북양함대는 여순항을 버리고 웨이하이 요새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육군과 해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웨이하이의 전투는 육군과 해군이 동원되어 1895년 1월 20일부터 2월12일까지 23일간 진행되었으나, 웨이하이 요새도 결국 일본군에 함락되고 말았다.

1895년 3월 일본군은 북으로는 북경이 바라보이는 곳에까지 진격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청왕조를 위협하였다.

남으로는 타이완 부근의 펑후제도(澎湖群島)를 희생자 없이 점령하였고, 3월29일에는 타이완을 점령하였다.

이처럼 패색이 짙어지자 청나라는 일본에 강화를 요청하였다. 1895년 4월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하여 청나라는 조선을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해주는 방식으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였다.

이로써 유사 이래로 유지해왔던 중화제국의 동아시아 패권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었다.

제물포 개항장에서 번성하던 청국 거주지가 일시에 몰락한 것은 물론이다.

 


황해바다 속 엘도라도…고승호, 역사의 보물선으로 인양


청나라서 빌린 영국 배, 인천 울도 앞바다 침몰...19세기말 동·서양 유물 다수

 

▲ 미국기자 트럼블 화이트의 책에 수록된 '침몰하는 고승호' 삽화
▲ 미국기자 트럼블 화이트의 책에 수록된 '침몰하는 고승호' 삽화
▲ 고승호 인양 유물들.
▲ 고승호 인양 유물들.

 

 

풍도해전에서 일본의 공격을 받아 울도 앞바다에 침몰한 고승호는 일제강점기부터 보물선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끊임없는 인양 작업이 시도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침몰했지만, 고승호의 항해는 끝나지 않고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인천시립박물관이 지난 2015년 5월부터 7월까지 '고승호, 끝나지 않은 항해' 기획특별전을 개최했다.

'고승호 침몰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 사건과 잊힌 역사'라는 주제로 열리는 전시회에선 고승호 관련 역사기록과 사진자료와 함께 고승호에서 건져올린 유물 등 실물 자료 2000여 점이 전시돼 관심을 끌었다.

고승호는 영국 국적의 배로 1894년 7월 청일전쟁 때 인천 울도 앞바다에 침몰됐다.

당시 청나라는 이 배를 빌려 1200여 명의 병사와 야포 12문, 그리고 대량의 군자금을 싣고 오다가 일본 함대의 포격을 받고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이후 고승호에 실려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금은보화와 보물 300만 점에 관한 얘기가 끊임없이 나돌았다.

1925년 다나카(田中)라는 일본인이 해저에 수장된 은괴를 인양하려고 일본 고베에서 잠수부를 동원한 이후 1933~1935년에 집중적인 인양작업이 펼쳐졌으나 실패하였다.

한동안 잊혀졌던 보물선 고승호는 1980년대 다시 언론에 재부상한 이후 2001년 대아실업의 투자사인 '골드쉽'이 드디어 고승호 발굴에 성공했다.

막상 인양된 고승호에는 소문과는 달리 약간의 은화와 엽전, 총기류, 탄알, 쌍안경, 선박용 온도계, 군인 신발, 도자기류 등이 발견됐다.

비록 막대한 은괴는 없었지만, 고승호는 19세기 말 동·서 문화를 보여주는 역사의 보물선으로 인천 앞 황해바다에서 인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