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굴꾼 마수로부터 고려왕실의 유물 지키다

 

▲ 강화군 내가면 내가저수지(일명 고려지) 주변 북쪽에는 1907년 이전에는 고려시대 고분이 많았다고 한다.

 

▲ 도굴되었던 고려 제23대 왕 고종(재위: 1213~1259)의 무덤 '홍릉'. 최근 복원됐으며 강화읍 국화리 산 180번지에 있다.

 

▲ 박계석 의병장 총살 보고서. <폭도에 관한 편책> (경비수警秘收 제844호. 1908.11.16.).

 

▲ 강화·개성 등지의 고려 고분에서 도굴한 것 중 하나로 추정되는 고려자기(포도동자무늬 표주박모양 주전자). 1909년 도굴품을 창덕궁 이왕가박물관이 당시 950원 매입했다.

 

강화진위대 8년간 근무 중 군 해산 맞아
이듬해 지홍윤 휘하 의진서 중대장 맡아
도굴범 6명 처단·수 차례 일본군과 교전
11월12일 순사대에 피체…압송 중 순국


◆ 의병장이 된 강화분견대 병정
강화진위대 입대하여 강화분견대가 해산할 때까지 약 8년 동안 근무하였고, 지홍윤(池洪允) 의진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인천경찰서 순사대에 의해 피체, 끝까지 항거하는 바람에 피살된 박계석(朴啓石) 의병장은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354번지 출신으로 이명은 박개석(朴開碩)·박완민(朴完民)이라 했고, 피체될 당시 주소는 '송정면 솔정동(率井洞)'이었다.

그는 김용기(金龍基:일명 김봉기金鳳基) 의진의 돌격대장 지홍윤 부대에서 배를 이용하여 강화지역과 황해도 지역을 오가며 맹활약했던 의병장이었다.

◆ 의병투쟁과 고분도굴범·밀정 처단
일제는 1908년 8월 중순부터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의 의병 진압을 위해 군함과 수뢰정을 동원하고, 육전대를 파견하여 종전의 군경과 일진회원으로 구성된 자경단 등과 합세하니, 그 인원이 400여명이나 되었다. 이에 김용기 의병장은 무기 구입을 위해 한성(서울)으로 향하고, 지홍윤·박계석 의병장은 의진을 일시 해산한 후 무기를 숨긴 채 은신하고 있었다.

그 해 11월12일 박계석 의병장은 삼해면 하도동 주막에서 인천경찰서 순사대에 의해 피체되었다. 일본 군경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나왔다가 고부성(高夫成)과 함께 변장순사대에 피체되었던 것인데, 그 과정에서 품속에 지녔던 권총으로 순사에게 부상시켰다고 하니, 접전이 벌어졌던 것으로 추정되며, 두 사람은 강화주재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강화도진위대 병정이 되어 1년 전 해병(解兵)이 되었는데, 나는 올해 2월23일부터 폭도의 수괴(首魁:의병장-필자 주) 지홍일(池洪一:본명 지홍윤池洪允-필자 주)의 부하로 들어갔다. 지홍일 집단(集團)은 돌격대(突擊隊)로서 나는 그 중대장(中隊長)의 역을 하고 있었다.

음력 7월, 고부성·황재호(黃在浩)·김기섭(金基燮)과 같이 각각 모젤 총을 갖고 서문 밖 지방돌(地方突:현 강화읍 국화리에 있는 지명-필자 주)에서 부내면 송대현(宋大鉉)과 산이포(山伊浦) 양학진(梁學辰)이란 자를 일본인의 밀정이라 하여 총살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2권. 407쪽)

박계석은 강화군 내가면에서 일본인 10여명이 고분을 도굴하는 것을 습격하여 그 중, 3명은 총살하고, 3명은 생매장하였으며, 도굴범들이 소지했던 엽총 3정(6연발 1정)을 탈취한 후 의병 90여명과 간점면에서 일본 헌병대와 전투를 벌였고, 다시 7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말도(唜島)에서 배를 타고 황해도 연안군 증산포(甑山浦)로 가서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였던 사실도 진술하였다.

이어 김용기·지홍윤·박계석 의진에 대하여 고부성의 진술이 기록되어 있다.

"올해 음력 2월8일 폭도수괴 지홍일의 부하에 투입, 동일부터 황해도 배천군내를 왕래하고 있었는데, 지홍일의 집단은 돌격대이고, 나는 그 부하이다.

지금 폭도의 일가(一家:지홍윤 의진-필자 주)가 가지고 있는 총은 30년식 13정, 엽총 20정, 모젤 총 60정가량으로 탄약은 1인당 80 내지 100발이다.

총대장은 김봉기, 중대장은 지홍일(돌격대)와 박계석이다. 분대장은 강화 부내 김귀봉(金貴奉), 석포 김장석(金長石), 경성 궉종석(宗石), 인천 유학도(劉學道) 등 4명으로 소모장(召募將)은 김장석이고, 금찰장(禁察將)은 부내면 고재환(高在煥)이다.

김봉기는 경성사람이고, 지홍일은 강화부내 출신이다. 김봉기는 경성의 서양인으로부터 무기를 매입한다고 현금 1400원을 가지고 갔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408~409쪽)

이로 인해 김용기·지홍윤·박계석 의진의 구성원이 밝혀지게 되었고, 김용기 의병장은 무기 구입을 위해 서울로 간 것이 드러나게 되어 마침내 피체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908년 11월16일, 인천경찰서장 경시 미야다테(宮館貞一)는 내부경무국장 마쓰이(松井茂)에게 '폭도의 공술 및 폭도 총살의 건'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보냈다.

"박계석은 올해 음력 2월13일, 고부성은 올해 3월8일 공히 폭도수괴 지홍일의 부하로 투신하여 오늘날까지 각지에 출몰, 배회하고, 혹은 일본 수비대·헌병대·경찰관과 누차 격돌하였고, 혹은 일본인에 대하여 흉악한 해를 가하고, 또는 금품을 약탈하는 등 망상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특히 박계석은 중대장 동등의 지위에 있었던 자로서 별지 '청취서발록(聽取書拔錄)'과 같이 그 폭행을 한 증빙이 충분한 자이므로 형사소추의 목적으로 강화도순사주재소에서 본속서(本屬暑:인천경찰서-필자 주)로 압송 도중, 형구를 파손하고 저항을 기도하므로 부득이 압송 순사가 총살하였다고 보고를 해 와서 이를 보고한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406쪽)

11월12일 박계석 의병장을 체포하여 약 5일 동안 고문을 가하여 그의 의진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김용기·지홍윤 의진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였는데, 저항하여 총살하였다는 것이다. 인천경찰서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형구를 파손하고 저항을 기도"했다는 것은 탈출을 기도한 것으로 보이며, 고부성도 그날 탈출하다가 총탄을 맞은 채 어느 집에 숨어들었다가 밀고에 의해 피체, 총살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보다 하루 전인 11월11일 김덕순(金德順)이 피체되어 진술한 내용 속에 그가 중대장으로 활약한 김봉기·지홍윤 의진이 매우 강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김봉기·지홍일은 가장 세력이 있는 자로서 지홍일은 원 본도 진위대의 하사로 왕군(往軍:지난날 군대-필자 주) 동학당 토벌 시 장교의 명을 좇지 않고 빈번히 용감한 행동을 한 소문 있는 자이므로 그가 수비대·헌병 등과 봉착하였을 시 아직 일찍이 적어도 대항하지 않은 일이 없다. 고로 군대 소양도 있거니와 시시로 조전(操典)도 하는 일이 있어서 10월29일 고려산(高麗山)에서 14명의 일본인을 습격하고 신촌동(新村洞)에서 헌병·경찰관과 봉착 접전한 당일도 그 주간 부근에서 조전을 하였다고 한다. 평소 다소의 훈련을 하고 있어서 행동이 항상 민활하고 교묘하여 거래출둔(去來出遁)하는 자이므로 우선 김봉기·지홍일의 양인이 있는 동안은 도저히 폭도의 섬멸을 기할 수 없을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418쪽)

◆ 강화도의병 진압과 공훈록 유감
일제는 1908년 11월22일부터 강화도를 근거로 하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이른바 '대토벌작전'을 또 전개했는데, 강화권역의 먼 지역부터 강화도로 의병을 추격하는, 이른바 '토끼몰이' 방식이었다.

개성경찰대·개성수비대·개성헌병대·용산수비대 등을 동원하여 풍덕군 동면 하조강(下祖江)에 이르기까지 수색한 후 강화도 건너편 임진강(臨津江) 경계를 하고, 군대는 11월26일 각 방면으로부터 강화도에 건너가서 28일까지 포위공격을 하는 작전이었으니, 강화도에 기존 수비대, 순사대, 일진회원으로 구성된 자경단과 함께 강화도의병을 토끼몰이 하듯 진압 작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때마침 인천으로부터 강화·김포·부평·통진을 경유하는 일본군의 군용전화가 개통되었기에 신속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들의 행동에 날개를 단 셈이었다.

이에 지홍윤 의병장은 휘하의 중대장 박계석과 의병 고부성·김덕순 등이 피체되자 의진을 이끌고 배를 이용하여 황해도 지역으로 나아가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독립유공자공훈록> 제9권(1991)에는 그가 "강화 및 임진강 하류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친일파 제거와 정보 수집 및 적선(敵船) 습격 등의 활동을 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는데, 자신이 이끈 의진의 의병보다 두 단계나 낮은 서훈이었다. 그리고 1908년 10월14일 전사하였다고 했는데, 그는 그해 11월16일(음력 10월23일) 순국하였다.

 

▲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이태룡 박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