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전만 해도 … 인천 앞바다 명물은 '조기와 민어'

 

황해 주민은 최고 생계수단으로 어업 꾸려
고깃배들의 불빛 장관은 기록으로도 남아
오늘날 대표 수산물은 '꽃게·홍어·까나리'



'초여름에는 연중행사처럼 조기를 통 단위로 사다가 집집마다 굴비를 말렸다. 단오에는 준치와 도미국을 먹었고, 여름철에는 민어를 무더기로 들여다 회·지짐이·구이로 포식하고, 나머지는 절이거나 포를 떴고, 알은 따로 어란을 만들었다.'

의사이자 향토사학자였던 신태범(1912~2001) 박사가 책 <인천 한 세기>에 써내려간 기억이다. 집집마다 통으로 사들였던 조기는 1968년부터 인천 앞바다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한때 어선과 상선이 2000~3000척에 달했다는 연평도 조기 파시(해상 시장)도 열리지 않았다.

●"황해에서는 조기가 으뜸이었다"

조기는 봄이면 알을 낳으러 남쪽 바다에서 황해를 거슬러 올라왔다. 조기떼는 제주도 남서쪽부터 평안도까지 헤엄쳤다. 흑산도부터 전남 영광 법성포, 고군산군도, 덕적군도를 거쳐 마주하는 연평도가 조기잡이 중심지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조기가 (황해도) 해주목 남쪽 연평에서 나고, 봄과 여름으로 이어지는 때에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두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았다.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두어 나라 비용에 썼다"는 대목이 나온다. 주강현 국립해양박물관장은 <조기에 관한 명상>(1998)에서 "황해의 민중들은 조기잡이를 최대의 생계수단으로 하여 어업을 꾸려왔다"며 "동해에서는 명태가, 남해와 제주에서는 멸치가 유명하다면 황해에서는 조기가 으뜸이었다"고 했다.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1758~1816), 정약용의 제자였던 이청(1792~1861)이 함께 쓴 <자산어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 백과사전으로 꼽힌다. 자산어보는 '석수어(石首魚)'로 시작한다. "크고 작은 여러 종이 있다"는 설명이 붙은 석수어에는 하위 범주로 참조기와 민어가 분류돼 있다. 자산어보에서 '자산'은 흑산도의 별칭이다. 정약전은 유배지였던 흑산도에서 200여년 전 황해의 해양생물을 정리한 것이다.

조기와 함께 자산어보의 첫 장을 연 민어는 신태범 박사가 소개한 대로 한 세기 전 여름철이면 인천에서 무더기로 볼 수 있었던 어종이다. 지금도 신포시장 골목길로 들어서면 민어회와 민어탕을 파는 집이 몇 군데 남아 있다.

민어 어장은 덕적군도 근해가 첫손가락에 꼽혔다. 동아일보 1925년 6월25일자에는 "조선 삼대 어장 중의 하나로 민어잡이로 유명한 인천 근해 굴업도 어장"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인천 출신 이세기 시인은 2018년 국립민속박물관이 발간한 <잡어의 어장고 인천어보>에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 … ) 6월 말부터 시작해서 8월까지 덕적도, 굴업도, 백아도 인근 바다는 민어밭이었다. 어린아이만한 민어가 지척으로 잡혔다"고 썼다.

고깃배가 몰리는 어장에는 밤마다 불빛이 가득했다. 덕적도 남서쪽에는 울도라는 섬이 있다. 조기와 민어, 그리고 새우가 많이 잡힌 방우리어장으로 유명세를 떨친 곳이다. 어두운 밤 배들이 켜놓은 불빛을 일컬은 '울도어화(蔚島漁火)'는 덕적팔경 가운데 하나다.

어화는 황해 섬들을 따라 피어 올랐다. 고군산군도의 선유팔경에도 장자도 일대에서 불을 켜고 고기를 잡던 모습을 일컫는 '장자어화'가 전해진다. 장봉팔경의 '강구어화', 강화십경의 '오두어화', 교동팔경의 '서도어등'도 고기잡이배의 불빛이 빚은 장관을 담아낸 표현이다.

●꽃게·홍어·까나리로 쓰는 '인천어보'

인천 앞바다에서 황금어장을 이뤘던 조기와 민어는 1960년대 이후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조기가 산란하던 한강 하구의 오염과 모래 채취, 남획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산란기인 여름철에 황해를 헤엄쳤던 민어 역시 "우리나라에선 인천, 덕적도 앞바다가 주 산란장"이라는 서해수산연구소 기록으로 과거를 추억할 뿐이다.

조기가 사라진 그물은 꽃게로 채워졌다. 꽃게는 황해가 '조기의 바다'였을 때까지만 해도 주목받지 못했던 존재였다. 만도리어장으로 활황을 이뤘던 장봉도에선 1970년대까지도 꽃게를 빻아서 거름이나 사료로 썼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연평도 어민들은 자취를 감춘 조기 대신 꽃게를 잡아 일본으로 수출해 돈벌이로 삼았다.

1980년대 이후 급랭 기술이 발달하고 밥상에서 인기를 끌면서 꽃게는 황해의 대표 수산물이 됐다. 연평도는 '꽃게의 섬'으로 탈바꿈했고, 인천 연안부두와 소래포구는 꽃게철이면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했다. 2018년 옹진군 자료를 보면 어류(2123t)·조개류(1475t)·해조류(1501t) 등을 포함한 전체 수산물 어획량 6661t 가운데 꽃게는 1283t으로 19.3%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대부분인 1009t의 꽃게는 연평어장에서 잡혔지만 영흥면(110t)·덕적면(87t)에서도 올라왔다.

연평도를 포함해 서해5도로 통칭되는 백령도·대청도에선 꽃게가 드물게 잡힌다. 연평도와 거리가 떨어져 있고, 수심 등 어장 환경이 다른 탓이다. 백령도를 대표하는 어종은 까나리다. 2018년 옹진군에서 어획된 까나리 1579t은 모두 백령면에서 잡혔다.

백령도에선 까나리를 잡으면 포구에서 바로 소금에 절여 액젓으로 담그거나 삶아서 말렸다. 백령도 특산품으로 자리매김한 까나리액젓이 지금은 가공공장에서 대규모로 생산된다. 옹진수협 백령사업소 관계자는 "백령도 까나리액젓 연간 생산량은 800t, 매출액은 30억원 규모에 이른다"고 말했다.

황해를 주름잡는 대표적 어종으로는 홍어도 손꼽힌다. 서해수산연구소 자료를 보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전국 참홍어 어획량 2616t 가운데 1232t(47.1%)이 인천에서 잡혔다. 같은 기간 '홍어의 섬'으로 불리는 흑산도가 있는 전남보다 어획량이 3년간 앞서기도 했다. 특히 대청도는 홍어 주산지다. 흑산도 홍어가 목포와 영산포로 옮겨지며 삭힌 맛으로 유명세를 떨쳤다면, 대청도 홍어는 생물로 입맛을 사로잡았다.

홍어와 조기 모두 황해를 헤엄치며 살았다. '물 반 조기 반'이었던 연평도는 영광 법성포와, 홍어잡이의 중심 항인 대청도는 나주 영산포와 같고도 다른 맛을 공유했다. 밥상의 이야기도 바다로 연결됐다.

 

 




[홍어 팔러나갔다 표류한 문순득'동아시아 해양문화'를 싣고 오다 ]

황해 물길을 따라 헤엄치는 홍어는 동아시아 해양문화가 기록으로 남게 한 역사의 조연이기도 했다. 200여년 전 흑산도 앞바다에서 홍어를 싣고 가다가 망망대해를 떠돌았던 문순득(1777~1847)의 이야기는 유배 중이던 실학자 정약전의 손을 거쳐 <표해시말>이라는 책으로 남았다. 3년 2개월에 걸쳐 오키나와·필리핀·마카오를 눈에 담은 표류기다.

문순득은 지금의 전남 신안군 우이도에 살았다. 1801년 12월 홍어를 팔려고 나주 영산포로 가던 그는 돌풍을 만나 오키나와, 당시 류큐국까지 휩쓸려갔다. 8개월 만에 조공선을 타고 중국으로 향했지만 다시 강풍으로 여송, 지금의 필리핀에 닿았다. 1803년 9월에야 마카오 땅을 밟았고, 중국 대륙을 걸어 1805년 1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문순득은 당시 우이도로 유배를 와 있던 정약전에게 생생한 모험담을 들려줬다. 유배지에서 해양생물학 백과사전인 <자산어보>를 썼던 바로 그 정약전이다. 문순득의 눈과 귀에 새겨진 기억은 오키나와·필리핀의 전통문화뿐 아니라 토착 언어까지도 아울렀다. 문순득은 1809년 제주도에 9년째 머물렀던 필리핀 표류민 통역을 맡아 고국으로 돌려보낸 '민간 외교관'으로도 기록돼 있다.

문순득의 목격담은 <표해시말>에 그치지 않았다.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는 문순득의 집에 머물며 오키나와·필리핀·마카오 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최초의 외국 선박 논문인 <운곡선설>을 썼다. 문순득은 서양의 배가 드나들던 아시아 최대 무역도시 마카오 시장에서 받은 충격을 정약전의 동생인 정약용에게도 풀어놨다. 둘 사이의 대화는 <경세유표>에 실린 화폐 제도 개혁안의 실마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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