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생겨난 것이 의외로 많다. 왜 하필 '인천'이냐며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1883년 제물포항 개항 이래 인천이 외국 문물이 들어오는 길목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짜장면이 1905년쯤 인천타이나타운(중구 북성동) 내 중국요릿점 '공화춘'에서 처음 선보인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라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좀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다면 차이나타운에 있는 짜장면박물관을 찾으면 된다.

쫄면은 1970년 '광신제면'(중구 경동)이라는 냉면공장에서 일어난 실수의 산물이다. 어느날 한 직원이 면을 뽑는 사출기의 구멍을 잘못 맞추는 바람에 평소보다 더 굵은 면발이 나왔는데, 냉면보다 덜 질기면서도 탱탱했다. 직원은 버리기가 아까워 인근에 있는 '맛나당'이라는 분식점에 공짜로 주었고, 그곳 주인은 면에 고추장을 버무려 팔었는데 공전의 히트를 쳐 쫄면의 원조가 됐다.

지난날 군대에서 크게 유행한 노래 '성냥공장 아가씨'에 등장하는 성냥 얘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1917년 인천 동구 금곡동에 설립된 '조선인촌'은 남자 200여 명, 여자 300여 명의 직원을 두고 압록강 오지에서 목재를 배편으로 들여와 성냥을 만들었다. 성냥 제조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어서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을 많이 고용한 것이 '성냥공장 아가씨' 탄생 배경이다.

1882년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호'를 타고 제물포항에 들어온 영국 군인들은 선상 생활의 따분함을 달래기 위해 부두로 나가 축구를 했다. 이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인근 주민들은 흰색 저고리에 대님을 맨 채 영국인들이 두고간 공을 찼는데, 이것이 한국 근대축구의 효시다. 지난날 학생들이 소풍을 갈 때면 어머니가 김밥과 함께 챙겨주던 사이다는 1905년 중구 신흥동에 세워진 '인천탄산제조소'라는 사이다공장에서 첫선을 보였다.

인천 사람들은 흔히 '짠물'로 불린다. 인색해서가 아니라 인천이 근대식 소금의 원산지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천일염은 품질이 좋았지만 청나라에서 막대한 양의 소금이 수입돼 소금 생산업자들이 타격을 입자 정부는 1907년 인천 주안에 최초의 근대식 염전을 만들었다. 이밖에 호텔(대불호텔), 서구식 공원(자유공원), 극장(협률사), 기상대(인천관측소), 담배 공장 (동양연초회사), 공립 박물관(인천시립박물관) 등도 '최초'의 반열에 들어가는 인천 시설물이다.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되면 인천에 사는 것에 좀처럼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을 조금 바꾸는 계기가 될 것 같다.

김학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