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마을 사랑방이자 위기 처한 노·아의 집 돼야"
▲ 작지만 큰 교회, 지역 소외계층의 친구와 이웃이 되겠다는 정상시 안민교회 목사.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교단 지도자 신군부 조찬기도회에 충격
잃어버린 교회 회복 민중교회운동 전개

초기 노동상담소 활동·지역 아지트 역할
아동센터·노인쉼터 열고 급식소도 운영

역사의식 없는 막말 집회 반복음·퇴영적
분단 구조에 기댄 왜곡된 정치 비판해야



"건강한 대형교회, 중형교회, 작은교회는 각각의 역할이 있고 다양성 속의 일치를 이뤄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작지만 큰 교회, 지역 소외계층의 친구와 이웃이 되겠습니다. 그들의 손을 잡아주겠습니다."

정상시 안양 안민교회 목사는 부유하고 화려한 교회도 많지만 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역할에는 오히려 부족함이 있는 것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권력을 잡은 신군부를 위한 조찬기도회에 한국교회 최고지도자들이 모여 축복 조찬기도회를 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교회에 질문이 생겼다. 희생당한 약자, 아벨의 편에 서야 할 교회가 불의하고 강포한 권력의 편에 선 모습이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교회가 무엇이냐?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 그리고 교회가 서야 할 자리를 성찰하고 다시 생각했다. 교회는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를 자유하게 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은총의 공동체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본래의 교회였고 그 잃어버린 교회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1980년대 이른바 민중교회운동으로 나타났다. 원래의 교회는 민중교회였다는 자각에서 출발한 교회 본질 회복과 갱신운동이었다.

정 목사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의 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시작이었다"며 "우리 교회는 규모는 작지만 지역사회나 역사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왔다"고 회상했다. 이어 "3·1운동 당시 교회는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았지만 역할은 매우 컸었다.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 말씀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교회가 많은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노아(老兒)의 집을 말하다
정 목사는 교회가 지역에서 어려움과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서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단체여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하지만 초기에 교회 본연의 예배공동체이자 신앙공동체로서 자리매김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는 이 시대 노아의 집을 말한다. 소외된 노인과 아동을 품는 노아(老兒)다. 맞벌이나 한 부모 가정의 아이들 돌보미가 선교 중 하나이고, 어르신과 노동자를 위한 교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했으며 현재도 그 과정에 있다.

초기 노동자를 위한 교회로 출발한 안민교회는 노동상담소를 운영했고 지역사회 문화교실과 아지트, 피난처, 쉼터 역할을 해왔다.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라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라'는 슬로건은 교회 본질의 이야기다. 정 목사는 끊임없이 교회 본질에 대해 질문을 안고 살아왔다. 잃어버렸던 교회의 형상에 대한 관심을 목회자에 적용하려 설교하며 여러 가지 사업을 이어갔다.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안민교회 아동센터가 하나의 예다. 또한 노인쉼터를 운영하면서 그들의 소통공간과 사랑방을 제공했다. 매일 40여명이 노인쉼터를 찾고 매주 목요일 그들을 위한 급식소를 운영한다. 물론 아이들 급식소는 매일 운영하고 있다.

2013년 교회를 안양 박달동으로 이전했다. 다시 교회의 정체성과 선교 방향을 물었다. 그 물음에 대한 응답이 마을교회, 마을 목회였다. 인터뷰가 진행된 1층을 마을 사랑방으로 개방하고 있다. 현재 카페형, 작은 도서관으로 꾸며져 있으나 사실은 마을 사랑방이다. 지역사회와 마을의 다양한 모임방, 주민 교육, 시민 교육 등으로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 물론 모든 것이 무료다. '안양 시민의 힘'과 같은 단체도 여기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주일은 교회 친교와 교육 공간으로 쓰인다.

#종교인으로 본 정치
그가 신학대를 다닐 당시는 겨울공화국이라고 불리던 유신시절이었다. 그는 고뇌하고 몸부림치고 투쟁했다. 그 와중에 옥고도 치렀다.

그가 생각하는 목회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고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것이고 성도를 성도되게 하는 섬김의 사역이었다.

정치에 목소리를 내는 종교인에 관한 쓴소리도 이어갔다.

정 목사는 "교회와 정치는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 없다. 교회는 잘못된 권력에 대해서 예언자로서 광야의 외치는 소리를 말해야 한다"며 "그러나 민초의 삶의 현장과 동떨어지고 때를 분별하는 역사의식이 없는 막말 집회 행태의 정치 참여는 반복음적인 퇴영적 교회의 모습일 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교회는 평화를 만드는 교회가 돼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 아픔의 뿌리인 분단 구조를 넘어서는 비전을 선포해야 하며 정치적 발언을 하려면 분단 구조에 기댄 왜곡된 정치를 비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역사도 전쟁과 폭압의 역사이고 하루하루 민초의 삶도 전쟁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내년이 한국전쟁 발발 70년이지만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생각이다.

정 목사는 "교회가 평화 동산 길의 등대가 돼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가 평화를 만드는 교회가 아니라 분단과 분열을 만드는 교회가 되지 않았는지 아프게 돌아본다"며 "새해에는 정의, 평화, 생명의 복된 세상이 열리길 바란다"고 소망을 밝혔다.
 

 


 

정상시 목사와 안민교회가 걸어온 길

 

▲ 30여 년 동안 안민교회가 실천했던 다양한 활동들을 이야기하는 정상시 목사.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 30여 년 동안 안민교회가 실천했던 다양한 활동들을
이야기하는 정상시 목사.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정상시 목사는 1955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경남 거창고 졸업 후 1975년 한신대 신학과에 입학해 1984년 졸업했다. 1988년 10월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2004년 안민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안민교회는 1987년 5월 '교회를 교회되게, 복음을 복음 되게 하라'라는 기치 아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억눌린 자의 자유와 포로 된 자의 해방 신앙공동체'를 지향하며 안양시 박달동에서 '박달교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됐다(정상시 전도사). 안양 노동상담소, 노동자 문화교실(기타반·영화반), 박달무료 진료소 등의 선교 사업을 하고 있다.

1994년 교회의 본질을 다시 물으며 민중선교의 새로운 틀을 모색했다. 노동자 선교에서 주민과 생활현장 중심 선교로 변화했다. 이혼, 부모사망, 산업재해, 장기실직, 질병 등으로 인한 위기 가정의 문제, 노령화의 급속한 진전, 사회적 안전망에서 제외된 독거노인의 위기에 대한 응답이었다.

선교적 중심 비전은 '노아(老兒)의 집'이다. 위기 아동을 위한 공부방(후에 지역아동센터로 변경)과 어르신 경로 식당을 사업 시행했고 현재 안민희망둥지 지역아동센터와 어르신 사랑둥지로 이어지고 있다.

/오석균 기자 demol@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