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희생양 된 조선, 황해는 피로 물들어갔다

 

문화재까지 약탈한 프랑스는
해도에 본국어로 지명 넣기도
함대원 쥐베르 크로키 속에는
당시 강화도 모습 생생히 담겨

이후 점령 나선 미국으로부터
빼앗긴 수자기는 한국 들여와
잠시 인천시립박물관 전시도





대원군 집권하의 쇄국조선은 황해바다를 통해 연이어 찾아온 서양 함선들의 포함외교에 직면하였다. 이에 가장 적극적인 구미국가는 선교금지 조처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벌이다 여러 차례 탄압으로 자국의 선교사들이 처형된 프랑스였다. 이미 1846년과 1856년에 군함을 보내 조선정부에 거듭 항의한 바 있던 프랑스는 박해를 피해 탈출한 리델(Ridel) 주교가 황제에게 조선의 천주교 탄압의 실상을 알리는 한편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P. G. Roze) 제독에게 프랑스 제국 함대의 조선 정벌을 촉구하였다.

이에 함대 사령관인 로즈 제독이 황해바다로 들어와 우선 제물포 일대 해안과 강화, 한강 일대의 수로를 탐사하면서 조선 정벌에 나섰다. 로즈 제독은 해도에 조선의 여러 섬과 지명들에 대하여 제멋대로 프랑스식 지명을 표기하였는데, 월미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따 '로즈 아일랜드(Roze Island)'라 표기하였다. 로즈 함대가 제작한 이 해도의 지명들은 이후 조선은 찾은 구미인들에게 그대로 전파, 통용되었다.

9월23일 1차로 2척의 군함을 이끌고 한강수로를 타고 서강에 정박하여 보상을 요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철수하였다. 그리고 2차로 10월13일 전함 7척, 146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원정함대를 이끌고 강화하구 강화해협에 이르러 강화도를 침공하여 강제 점령한 프랑스군은 문화재를 비롯한 온갖 약탈을 감행하다가 10월28일 철수하였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의 병사들 중에는 문학이나 그림에 재능이 있는 이들이 있었다. 프랑스의 중국, 일본 함대의 참모장을 역임했던 앙리 주앙(Henri Jouan)과 함대원이었던 앙리 쥐베르(Henri Zuber)가 이때의 경험으로 조서에 관한 책을 남겼다. 특히 앙리 쥐베르가 남긴 <한국지도에 관한 고찰>(1870)과 <한국원정>(1873)이라는 책이 주목할 만하다.

앙리 쥐베르의 책 표지에는 강화도 관리를 호위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표지화로 담겨 있다. 빗속에서 서릿발 같은 긴장된 눈을 번뜩이는 조선 병사들의 모습이 화가였던 쥐베르의 크로키 속에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그림 속에 나오는 병사들이 쓰고 있는 비막이용 갈모에 대해서도 쥐베르는 간편함과 실용성을 들어 높이 평가했다. 쥐베르가 조선인에게서 느끼는 가장 큰 불만은 그들의 생활이 매우 불결하다는 것이었다. 이를 제외한다면 전체적으로 쥐베르는 조선인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하지 않고 오히려 온순한 그들이 프랑스 군대의 침략을 받으면서 갖게 마련인 두려움과 공포를 연민에 찬 시선으로 기술하였다. 또한 쥐베르는 조선의 높은 문화 수준을 기술하기를 잊지 않았다.

훗날 강화도 원정 종군을 마치고 나서 1868년 해군을 떠나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나섰던 쥐베르의 이 책에는 또한 매우 사실적인 강화도 삽화 10장이 수록돼 있다. 로즈 함대는 강화도에 상륙해 정족산에 설치된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외규장각 의궤를 비롯해 중요 도서 약 300권을 약탈해갔다. 2002년 외규장각 건물은 복원됐고 외규장각 문서는 우여곡절 끝에 2011년 5월27일, 297책이 반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강화도를 약탈했던 프랑스 함대에 뒤이어 슈펠트(R. W. Shufeldt)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가 다시 서해안에 나타났다. 이들은 1867년 1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 호 실종사건을 탐문 차 서해 백령도 인근에 정박하여 조선 정부에 보내는 편지를 지방관에게 전달하고 돌아갔다. 제너럴셔먼 호 사건이란 1866년 8월 통상과 교섭을 요구하며 백령도를 거쳐 대동강을 거침없이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 정박해 약탈을 일삼자 평안도관찰사 박규수와 군민들이 화공으로 제너널셔먼 호를 불태우고 영국인 기독교 선교사인 토머스 목사와 중국인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미국은 이듬해인 1868년 4월 회신을 받기 위해 페비거(J. C. Febiger) 함장이 이끄는 함대를 보내지만 조선정부는 미국을 침략자라고 비난하면서 제너럴셔먼 호의 침몰과 선원 살해는 당연한 것이라는 회신을 보낸다.

1871년에 이르러 미국정부는 군함 알래스카(Alaska) 호를 비롯한 5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로저스(John Rodgers) 제독의 아시아함대를 파견하여 조선원정에 나섰다. 함대는 제물포 앞 물치도(勿淄島, 오늘날의 작약도)에 정박하고서 조선정부에 통상교섭을 요구하는 한편 모노카시(Monocacy) 호와 팔로스(Palos) 호를 보내어 강화해협을 탐측하였다. 두 배가 6월2일에 강화 손돌목에서 포격을 받게 되자 6월10일을 기하여 강화요새 초지진을 공격해 점령하였고 다음날에는 덕진진과 광성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름하여 '신미양요' 혹은 '조미전쟁'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7월3일에 강화도를 점령한 미 해병대가 철수하면서 끝났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하퍼스위클리> 1871년 9월호 7·8면에 보도된 신미양요의 치열한 전투상황을 보도하였다. 그런데 이들 신문 자료 외에도 '신미양요'를 직접 경험한 미 해병대원의 당대 기록이 남아 있다. 치열했던 광성보 전투에서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수(帥)자기를 빼앗고 그곳에 성조기를 내걸었던 틸톤(McLane Tilton) 대위가 그의 아내 나니에게 보냈던 편지가 남아있다. 이 편지는 미국 해군사편찬협회에서 <1871년 조선에서의 해병대 수륙양면 상륙작전>이라는 제목으로 1966년에 출간됐다.

틸톤의 편지 속에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 지옥 같은 전쟁의 현장에서 자신과 미 해병대의 용맹을 자랑하고자 하는 제국주의 군인의 숨은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 병사 40명을 불태워 죽인 것은 아무렇지 않게 서술하면서 '멋쟁이'로 소문난 부하 맥키 중위의 죽음은 안타까워하는 이중적 가치판단은 수자기를 함상에 세워놓고 사진을 찍으라던 제독의 명령 앞에 기립한 세 명의 공훈자들 사진에 잘 나타난다. 이때 탈취한 수자기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2008년 임대형식으로 한국에 들여와 인천시립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전시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황해바다가 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 오페르트 '금단의 땅: 한국으로의 여행'에 그려진 강화도 마니산
▲ 오페르트 '금단의 땅: 한국으로의 여행'에 그려진 강화도 마니산


[3차례 통상 요구하러 온 오페르트, 그때 인상 깊었던 '마니산' 그려]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 독일계 미국 상인 오페르트(Ernst J. Oppert, 1832~1903)가 조선의 황해바다를 세 차례 찾아왔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홍콩에서 무역업을 시작한 상인인데, 1866년을 시작으로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서해안을 탐사하면서 무례하게 통상을 요구하였다. 1866년 2월, 1차로 흑산도를 거쳐 아산만 일대를 탐사한 뒤 돌아갔다. 6월에는 2차로 충남 해미를 방문한 후 덕적도를 거쳐 강화도를 탐사하면서 조선정부에게 수교협상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한편,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조사해갔다. 오페르트의 세 번째 상륙은 1868년 4월에 일어났는데, 그는 바로 이때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 도굴을 시도하면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발각되어 실패하고 돌아갔다.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사건으로 인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탄압은 더 강경해졌다.

세 차례의 조선에 대한 통상요구가 모두 실패로 돌아간 후 오페르트는 독일에서 <금단의 땅: 한국으로의 여행>(1880)라는 책을 남겼다. 이 책에는 두 번째의 조선 탐사를 왔을 때 여러 날에 걸쳐 방문했던 강화도의 모습을 삽화를 곁들여 기록해놓았다. 하나는 '견고한 요새'로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강화도 포대의 모습을 그린 삽화이고 다른 하나는 마니산의 모습을 그린 삽화이다. 당시만 해도 마니산에는 나무가 헐벗어서 산 정상의 두 그루 나무가 인상적이었던 모양인지 매우 독특한 풍치로 묘사되었다.

오페르트는 영국 배 엠퍼러(Emperor) 호를 타고 교동도 앞을 지나 염하를 거쳐 한강 수로로 접어들기 직전에 수많은 군중들과 함께 나온 강화유수와 만나 통상요구를 조선정부에 조속히 전달해줄 것과, 이에 대한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강화부사 김재헌(金在獻)은 오페르트를 안심시키는 한편, 정부에 이 소식을 전하여 정부 특사가 나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조선인 특사가 일개 무역상의 통상교섭 요구에 대하여 안절부절못했다고 서술한 대목은 과장된 것이다. 조선의 자연과 기후에 대한 수려함과 대조적으로, 완강한 쇄국을 고수하는 조선 지배층에 대한 반감이 이 책에는 가득하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도 외국의 개방 압력의 굴복했거늘, 그보다 영토나 국력이 크게 열세인 조선이 쇄국으로 일관한다면 곧이어 포격을 맞을 것이라는 오페르트의 이 협박은 실제로 얼마 안 있어 강화도를 피로 물들인 두 차례의 양요로 현실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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