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일 논설위원

"… 인천에서 제일 볼 만한 배다리시장에 가본 즉, 어쩌면 그 같이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는지 한번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매우 곤란하다. 이뿐만 아니라 평시에는 우각동 마루터기에서부터 삼마장 거리나 되는 배다리까지 각 촌의 어른, 아이들은 물론이고 행인이 연락부절하였다. 빈손으로 나가는 자는 하나도 볼 수 없고, 모두 손에 주렁주렁 이것저것 들고 가는 자도 있고, 짐을 진 자도 있으며, 소에 잔뜩 실은 자도 있어, 방긋방긋 웃으며 불이 나게 나가는 모양이다. …" <매일신보>가 1915년 2월14일자에 '배다리의 시장풍경'이라는 제하로 올린 기사다. 100여년 전에도 배다리시장이 이렇게 번창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배다리는 동인천역과 붙어 있다. 동인천역을 중심으로 여러 시장이 들어서 성업 중이었는데, 중앙시장·배다리시장·청과물시장 등이 그 곳이다. 상인들은 많은 유동인구를 상대로 장사를 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더불어 동인천엔 술집을 비롯해 음식점과 잡화점 등 각종 가게들도 성황을 이뤘다. 인천 최대 소비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이다. 왜 '과거형'을 쓰냐면, 오늘날엔 번성을 뒤로 한 채 자꾸 퇴색하기 때문이다.

1883년 인천이 개항을 하고 1899년 경인철도가 인천~서울을 이으면서 축현역(지금의 동인천역) 일대는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번창의 길을 걸었다. 많은 사람이 오가면서 물건을 거래하고 서울로 교역을 하는 등 아주 큰 상권이었다. 그 후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도시개발과 교통 발달, 시청 이전 등 시대 흐름에 따라 쇠퇴기를 맞았다.

인천에서 태어나 자란 중년 이후 인천인들은 '동인천'을 떠올리면, 추억과 기억에 잠기곤 한다. 한때 먹고 마시고 즐길 만한 데가 많았던 동인천은 그야말로 생활의 중심지였다. 역을 기점으로 퍼져나간 동네 곳곳에선 '필요한 것'을 나름 해결할 수 있었다. 가령 1970년대에 유행이던 청바지(당시만 해도 미제밖에 없었다)를 사려면, 동인천역 옆 중앙시장 내 '양키시장(송현자유시장)'을 찾았다. 우리 체구와는 맞지 않는 바지를 즉석에서 수선해 입었던 기억이 새롭다. 양키시장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란민과 실향민 등이 모여 미(美) 군수품을 거래하던 곳이다.

인천시와 인천관광공사가 개최한 '동인천 낭만시장'이 지난 17일 성료됐다. 동인천역 북광장에서 열린 '낭만시장'은 과거 인천의 최대 번화가이자 상업지였던 동인천의 옛 모습을 재현하고자 마련됐다. 상인과 관람객들은 서로 화합하며 지역 활성화에도 이바지했다며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이 시장이 '복고'에만 그치지 말고 젊은 세대에겐 흥미를, 중년 세대에겐 추억을 선물하는 변신의 자리로 거듭났으면 싶다.